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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화 안 수행적 화

                                                                                                  

/양효실 (미술비평가)

윤미류의 회화는 장르상으로는 인물-초상화에 속한다. 작가는 학부시절에는 자신을 매료시켰던 대중매체가 재현하는 아웃캐스트들에 대한 공감적 탈-동일시를 시도했고, 2020년 이후 또는 30대에 들어선 후로는 가까운 사람들, 가령 여동생, 친할아버지, 레지던스의 동료 작가, 지인들을 모델로 인물화를 그리고 있다. 작가의 캔버스에 ‘얼굴’로 등장하는 주변인은 통상 화가와 그 사람의 관계, 즉 친숙함(familiarity)과 낯섬을 축으로 작동하는 친밀함(intimacy)의 스펙트럼으로 구성되고 재현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재현되는 인물의 내면, 특성, 심지어 인격을 그 인물을 맥락화하는 환경이나 오브제들과 함께 ‘읽는다’. 그들은 그렇게 우리에게 알려지고 동일시된다. 그들은 우선 작가가 잘 아는 사람으로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차이나 특이성을 관계로서 경험한 작가의 번역을 거쳐 우리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물론 지금처럼 공통성보다는 차이를, 문화적 보편성보다는 지역적 단수성을 중시하는 문화에서 공통의 경험과 감상을 위한 맥락을 읽어내기란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하더라고 힘든 일이다. 읽어내려면 그/그녀가 ‘속한’ 내부에 대한 정보나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는 데, 심지어 읽기에 저항하는, 나타나지만 이해에 저항하는 타자의 집요함이 압도하는 상황에서 예술경험은 벽을 만지는 듯한 몰-이해로 끝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윤미류의 지인들이라는 단서, 작가가 아는 사람들을 회화적으로 재현, 구성한 것이라는 정보로 인해 우리는 인물화의 관습을 ‘갖고’ 캔버스 앞에 선다. 그리고 그 즉시 이 인물화는 이상하다는 것, 읽히려는 데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작가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뭔가를 하고 있고 그들의 행위는 동사적으로는 현존할 뿐 그 이상의 묘사나 이해로 재-현하기 어렵다는 것이 첫 번째 어려움이다. 가령 그들은 물을 뒤집어쓰고 젖어 있고, 음수대에서 세수를 하고 있고, 벽에 그림을 걸고 있고, 나뭇가지를 들고 있고, 뒤집어진 호랑이 가면을 쓰고 있고, 거울을 보고 눈에 들어간 티를 꺼내고 있고, 뭔가를 먹고 있다. 그들은 전과 후가 없이 지금으로서, 행동으로서, 동사로서 나타난다. 가령 물을 뒤집어 쓴 여동생은 비가 와서라든지 실수로 물에 빠졌다든지 계곡에서 놀고 있다는 은유적, 서사적 맥락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 주변인들의 행위가 ‘자연스러운’ 행위가 아니라는 것, 즉 이들이 작가가 연출한 사진 속 인물로서 모른 채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정보)을 추가해야 한다. 작가는 자신의 지인들을 자신이 만든 상황 안에서 움직이도록 활용한다. 그들은 지금 여기에서 작가가 원하는 대로, 혹은 작가와 함께 들로 산으로 가서 행동해야 한다. 그들은 인물화에 등장한 예외적인 인간이 아니라 작가가 “회화의 시작점과 같은 단계로 에스키스이자 드로잉”으로 활용하는 연출사진의 배우들이다. 특정한 상황이 주어지면 그들은 그 안에서 자신의 의도나 자연스러움을 빼앗긴 채 행동한다. 그들은 무지한 채로,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대분에 맞춰 행동할 뿐이다.

 

          순간을 포착하는 탁월한 능력은 기실 사진의 것이다. 손에서 폰이 떠날 새가 없는 젊은 세대 혹은 동시대인은 보이는 것은 무엇이건 우선 찍고 갤러리에 저장한다. 가령 윤미류 작가의 연출사진은 1초에 8장까지 연속사진을 찍어낼 수 있는 아이폰에 의존한다. 현상, 인화의 공정을 겪는 기존 카메라를 이용한 사진은 찍기 전 생각하고 계산하는 과정이 요구되지만, 디지털 사진기는 그런 심사숙고의 과정이 불필요하다. 혹은 그런 과정을 역사적 과거로 만들면서 디카가 등장했다. 디카가 신체-몸의 일부가 된 환경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누군가의 갤러리에 찍힌 이미지로서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살아간다. 흐름-지속으로서의 시간 속에서라면 우리는 자기자신을 항변할 수 있지만, 가령 8분의 1초에 찍힌 사진 속 나는 나도 어찌할 수 없는, 타자 혹은 무명씨이다. 갤러리에 저장된, 그러므로 거의 잊혀진 사진 이미지로서의 인물들은 맥락과 서사를 제거당한 ‘가난한/헐벗는/부재하는’ 이미지로서 대우받는다. 그것이 일종의 손으로서의 디카와 아이폰의 세계에 속한 인간에 대한 대우이다. 윤미류 작가는 자신의 인물들을 그렇게 대우한다. 그들은 중요한 사람들이어서 재현되는 게 아니라 함부로 대해도 편한 지인들이기에 화면에 등장한다. 그리고 이렇게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배우들, 어떤 연기를 요구해도 들어줄 편한 사람들을 작가는 내면이 없는 피사체, 혹은 지금-여기에서 움직이고 있는 에너지-몸으로 활용/대우한다.

          생각하거나 내면에 침잠하거나 자기자신이거나 들려줄 이야기가 있거나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기존 인물-초상화에 이미 충분히 존재한다. 혹은 기존 인물-초상화는 그렇게 자신의 역할, 기능을 역설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빠르고 의도보다 앞서고 내면보다 먼저 움직이는 몸에 ‘충실한’ 매체들, 기술들의 시대에도 그 장르가 존재해야 한다면 그 장르에 잔존하던 기존의 의의나 특이성은 부재한 채로 그래야 한다. 따라서 어쩌면 작가는 인물-초상화의 껍데기를 빌려 사실은 다른 실험/유희를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주지하다시피 사진은 재현되는 인물을 빛-무더기로 대체한다. 단단한 외피와 안으로서의 인물, 대상을 그것의 표면을 만지고 돌아온 빛의 흔적으로 번역한 것이 사진이다. 사진은 순간의 기록이고 한 순간에 대상의 현존을 부재로 바꾸는 ‘낮은/천한’ 기술이다. 혹은 유일무이한 현존의 위상을 복제/반복가능성을 통해 제거해주는 해방적 장치이다. 양가적이다. 그것은 경멸이면서 해방이다. 그것은 존재를 지우면서 껍질, 표면, 바깥으로서의 대상의 무-의미를 증거한다.

 

          가령 작가에게는 가장 편한 지인일 여동생이 인물, 피사체, 배우로 등장한 인천 아트 플러그에서의 전시, 내가 작가에 대해 전혀 모른 채 우선 시각적 경험으로서 조우한 《I Always Wish You Good Luck, 2022》은 영문도 모른 채 강물로 들어가거나 그 안에서 외투를 벗고 들어올리는, 읽을 ‘수 없는’ 행위를 하거나 젖은 몸으로 이곳을 바라보는, 클로즈업 기법으로 과도하게 나타나는 여동생을 그린 것이다. 내게 이 전시의 흥미로움은 무엇보다 젊은 여성의 젖은 몸이 재현되지만, 그 몸이 에로틱한 혹은 포르노적 기법 없이 재현된다는 데 있었다. 젖은 몸은 물리적으로, 축어적으로(literally) 묘사될 뿐 문화적으로 번역, 재현되지 않는다. 심지어 재현된 여성 인물은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이고, 자신의 행동에 동의/공감 상태가 아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행동, 장면은 재현되었어야 하는가? 작가의 욕망은 문화적 맥락 안에서 회화적 이미지에 대한 실험을 하는 데 있는 것 같지 않다. 당연히 자연스러운 맥락에 얹혀지지 않은 이미지는 원초적 이미지로, 최초의 장면으로, 자율적인 파편으로 힘을 획득한다. 늘 보았던 에로틱한, 포르노적인, 자연스러운 이미지에서 윤미류의 여성 인물들은 탈락한다. 작가의 회화적 관심은 다른 데를 향한다. 가령 전시작에 붙여진 제목들이 그런 읽기의 단서일 것이다. “the play of light on the surface(표면 위에서의 빛의 유희)”, “it forms, flows, and falls(그것이 형태를 만들고 흐르고 떨어진다)”, “green ray(녹색 광선)”과 같은 영어로 붙여진 제목은 작가의 회화는 인물들이 아니라 회화성에 대한 실험, 천착임을 증명한다. 인물은, 인물화 인체하기는 말하자면 알리바이 혹은 미끼이다. 일찍이 자연-풍경화로도 할 수 있었을, 혹은 아예 작정하고 추상화로 넘어갔어도 되었을 주제들을 작가는 인물화를 경유해서 실험 중이다. 회화는 표면에 발라진 물감-빛의 유희이고, 물감은 형태를 만들고 아래로 흐르고 떨어지는 물질이고, 인물이 들고 있는 녹색 외투는 빛을 발하는 물질을 그리고 싶은 화가의 매혹이나 기쁨 때문이다.

          윤미류는 대단히 빠르게 그리는 화가이다. 슥삭슥삭, 슥슥. 자세히 보면 몇 번의 붓질인데, 그것을 우리는 재현된 인물로 ‘읽는’ 관습 안에서 경험한다. 나는 색에 대한 화가들의 섬세하고 심지어 관능적이고 쾌락적인 경험, 색으로 세계를 경험하는 화가들의 재능에 대해서는 청맹과니이다. 나는 글쓰기의 기쁨은 조금 아는 사람이니 그것보다 색으로 이 세계를 번역하고 감각하는 사람들의 기쁨을 유비해서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윤미류 작가가 블루, 레드, 그린, 웜톤, 쿨톤과 같은 단어를 발설할 때, 혹은 “눈오고 비오고 빛이 비추이는 다양한 외부자연 환경과 뒤섞이는 회화를 그리고 싶다”고 말할 때, 이 화가는 색으로 세계를 번역하는 사람의 기쁨을 이야기한 것으로 해석한다.

          자신의 인물들의 일상적이고 기능적인, 의식적인 표정이 지워졌을 때, ‘그 때’를 포착하려는, 통상 디카 갤러리에서는 제일 먼저 지워질 이미지일 가능성이 농후한 순간으로 자신의 인물들을 축소하려는 작가의 연출은 이제는 거의 가물가물한 앙드레 브레송을 생각나게 한다. 배우에게서 인격이나 개성이 지워질 때까지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게 하고 마침내 그런 것들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면 찍기 시작했다는. 휴머니즘으로부터 자신의 인물들을 구해내려는 감독의 물리적 착취와 예술적 사랑의 동시성.

          혹은 바르트를 빌려 또 반복한다면 윤미류의 회화는 수행적이다. 바르트는 “오직 언표행위의 시간만이 있을 것이고 모든 텍스트는 영원히 지금-여기에서 쓰여진다. 글쓰기는 〔…〕 언어학자들이 수행적 발화라 부르는 것, 희귀한 언어적/동사적 형태를 가리키게 되는데 언표행위는 그것이 제공하는 행위―왕의 ‘나는 선언한다’와 같은 것, 혹은 고대 시인들의 ‘나는 노래한다’와 같은―외엔 어떤 다른 내용도 갖지 않는다”는 문장으로 내면이나 숙고로서의 저자에게 죽음을 선포하고, 자동사적인 글쓰기, 쓴다는 것 외엔 어떤 기능도 목적도 없는 글쓰기의 출현을 선포했다.1) 그리고 그런 글쓰기는 지금 쓰는 사람의 기쁨, 주이상스에 바쳐진 것으로서만 존재한다. 인물화의 외피를 쓴 채로 빛을 현시하는 물감-물질의 힘을, 옅고 얇은 브러시스트로크로 주장하려는 이 젊은 화가의 동명사적 회화는 계속 현재형으로서 간다.

1) 롤랑 바르트, <저자의 죽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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